Sexual Knowledge, Sexual Science
The History of Attitudes to Sexuality
(Roy Porter, Mikulas Teich)

이 책은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성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변화했고 어떻게 공유되었는지에 관한 연구를 모은 책입니다. 주제를 중심으로 한 논문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죠. 주제는 특정 시대의 특정 나라에 관한 것들이 꽤 있고, 근친상간, 월경, 에이즈 등의 특정 주제에 대해 보다 넓은 자료를 끌어모은 것들도 있습니다.

상당히 사례 중심의 책이고,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에 대한 뒷조사들을 보고서로 올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어떤 결론이나 설득을 원한다면 허전해할 것이고,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어 충분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만한 이야기 중 하나는 근대 과학/의학이 발달하면서 성에 대한 통제권이 의사 집단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민간 요법만큼이나 의사 집단의 성지식도 상당히 무지한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며 그때까지 성지식의 전승과 적용에 주요한 역할을 해오던 여성 집단을 "무지한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성의 생물학적인 면을 근거로 삼아 여성을 낮게 여겼다는 사례들도 많이 나옵니다. 여성은 주기적으로 월경을 하는 불완전하고 불결한 존재라는 인식, 남성은 문명에 여성은 자연에 가깝다는 인식, 여성의 신체에 있어서 난소의 비중을 과대평가했던 인식 등이 이에 속합니다.

여성은 불결함을 월경으로 씻어내리기 때문에 더 깨끗하다든지, 남자든 여자든 몸속에 "씨"가 쌓이면 몸에 안좋으므로 성관계를 가져야 된다든지 하는 등의 반대되거나 그냥 신기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옛날 유럽 사람들이 그냥 생뚱한 이론들을 내놓으면서 우왕좌왕 했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요.

책을 덮으면서 들고 나올 것은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영향을 가지고 올 수 있고, 또 얼마나 큰 해악이 될 수도 있는가 입니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이나 도덕적인 이유로는 뜻을 바꾸지 않지만, 과학적인 이유에는 쉽게 순응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종교나 도덕이 그랬듯이, 지금은 과학이 위험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과학적 지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비극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이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근거로 한 판단들은 옳은 것일까요? 담배가 태아에 나쁘다는 사실은 남자보다 여자의 흡연이 더 금지되어야 할 이유가 되나요? 전자파가 태아에 나쁘면 임신한 여성은 컴퓨터로의 접근이 제한되어야 할까요? 여자가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수리적 능력이 낮다면 여학교의 이공계 학급수는 적어야 할까요? 생물학적으로 일부다처가 일부일처보다 유리하다면 우리 사회도 일부다처제를 권해야 할까요?

과학적 연구 성과들로부터 사회적 인식이 영향을 받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저도 과학지식 만능주의로부터 별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그것의 위험함이나 후유증은 큽니다. 그 과학적 지식이 더 명확하게 규명되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은 다분히 "근대적인 환상"입니다. 문제는 그 지식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에 반영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있을 때가 많으니까요.

2001.11.13. 닭의비행.

광고를 보아주는 사람들

Posted 2001/10/31 23:21, Filed under: 사회와 기술
한때 사람들이 광고의 경제적 가치를 잘 모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냥 당연히 있고 성가신 것쯤으로 생각했을 때 말입니다. 그땐 남들보다 뭔가 좀 아는 사람들이 "광고 덕분에 우리가 잡지도 싸게 보고 텔레비젼도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신선하게 일깨워주곤 했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기업들은 광고를 봐주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무엇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정시간 광고를 듣는 대가로 휴대폰을 무료로 쓰게 해주겠다는 회사도 있었고, 많은 인터넷 회사들이 광고를 수익모델로 출범했습니다. 사람들은 "광고를 봐주는" 행위가 응당 대가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더 이상 무료 서비스에 고마워하는 대신, 광고를 봐주고 개인정보를 제공했는데 할만큼 한거 아니냐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사람들이 광고 대상으로서의 자신들 스스로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렇지만 문제인 것은 아무도 그들의 가치가 얼마인지 가늠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고만을 수익모델로 했던 기업들이 거의 기아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광고 대상으로서의 사람들의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광고주들의 판단 또한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 구체적으로, 직접적인 대가를 받으면서 광고를 봐주는 사람들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광고를 보면 푼돈을 적립해준다던 어떤 회사의 사업 모델처럼요. 그런 회사에 광고를 주는 것은 과연 얼마를 지불할 가치가 있을까요? 그들의 몸값은 아마 전체 인구 중 최저일 것입니다. 광고를 본 그들이 상품에 돈을 얼마나 지불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광고를 보는 대가로 하나당, 혹은 10초당 얼마를 준다고 해도, 그 돈은 지극히 푼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푼돈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거나 지극히 시간이 남아돌아 굳이 안 볼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광고에 신경을 소모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고를 봐주는 그들이 특정 회사에 대해 아주 호감을 갖게 된다고 해도, 그리고 특정 상품을 정말 갖고 싶어하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쓸 돈은 뻔한 것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지갑에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 명이 보건 만 명이 보건, 미안하지만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와레즈 사이트에 있는 "한 번만 눌러주세요 배너"나 무료 만화사이트 옆에 떠있는 배너들은 상당히 딱한 것들입니다. 그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소프트웨어나 만화에 돈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이들이고, 그들이 돈을 쓸 상품을 찾기란 어차피 쉽지 않을테니까요.

반대로 유료 사이트에 있는 광고는, 아마 지불하는 이들이 짜증내지 않을 만큼 작고 조용하고 숫자도 제한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노출빈도에 비해 상당히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이들은 어떤 종류의 상품에 돈을 쓸 용의가 있는지가 명확하고, 다른 좋은 상품에 대해서도 돈을 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입니다.

2001.10.31. 닭의비행.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Posted 2001/10/29 23:20, Filed under:
The End of Work (Jeremy Rifkin)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유지하는 대가로 돈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저는 항상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가로 돈을 받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마치 조금은 더 쓸모있고 똑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죠. 매일의 일상에 소모되어버리는 느낌과는 달리.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창의적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작품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예술가처럼, 모든 사람들이 창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다면 어떨까. 단지 이제까지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무가치한" 활동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면. 어쩌면 지금 오고 있는 것이 그런 "창의적인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행복한 창의적인 세상이 아니라,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식량이 배급되지 않는 세상 말이죠. 무엇보다 세상의 창의적인 일자리는 이미 제한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제목에 무엇보다도 명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더 이상의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예전에도 이런 말이 있었죠. 생산자동화로 인해 사람들의 인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하기 위해 나사를 조였다 푸는 일을 계속 반복하게 시켜야 될지도 모른다고요. 이 책은 그런 맥락입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 차곡차곡 짚어나가고 있고, 아직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마저 깨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업, 공업, 서비스업, 지식산업. 인력의 이동은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음 단계의 중심 업종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충분히 흡수해줄거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그것은 환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단계조차 기계와 컴퓨터에 의해 대체되어 가고 있고, 그 이후의 단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요. 금빛으로 빛나는 지식산업이 도대체 몇 명이나 흡수해줄 것 같냐고요.

냉정하게 말해 세상은 점점 더 적은 수의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땅의 흑인들의 역사를 한 예로 들어 그들의 유목을 서술합니다. 남북전쟁을 통해 명목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그 이후의 기계화로 통해 이제는 "버림받은" 목화농장의 흑인들. 그들은 공장에 다시 흡수되지만 다시 버림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자리에서 일자리로, 더욱 더 나빠지는 상황을 감내하며 떠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이익이 국민의 이익인줄 알았던 시절과 국가가 돈을 풀어 국민을 먹여살려줄 수 있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저자의 주장은 노동시간 단축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주머니에 돈이 없어 시장이 구르지 않았던 지난 위기를 생각하면 기업들도 일자리 나누기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수출지향적인 경제를 일구어나가서 그런지 노동시간 단축은 태만이고 사치라고 기업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가 노는 것이 문제일까요, 세상이 모두 생산 과잉인 것이 문제일까요.

이 책은 약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그다지 힘이 실려있지 않고, 게다가 미국을 위한 대안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의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의 관념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두어야 할도 모릅니다. 노동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강박관념을 가지고 집착하는 대신, 삶의 한 쪽으로 밀어두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요.

2001.10.29. 닭의비행.

두 사람이다 (강경옥)

Posted 2001/10/29 23:19, Filed under: 만화
[두 사람이다]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포는 이미 선전포고를 했고, 이제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어떻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가 주인공의 문제입니다.

지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그렇지만 그 집안은 이른바 "저주받은 집안"입니다. 오랜 시간 전 선대에서 용으로 승천하기 직전인 이무기를 잡아 그 이무기의 한이 서리게 된 것입니다. "자자손손 너희 자손 주위의 2명씩을 조심해라."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다는 그 무서운 저주는 대를 거쳐 계속 내려오며 비극을 만들고 마침내 지나에게까지 다가옵니다. 이번 대의 희생양은 지나가 될 거라고 점쳐지는 거죠. 당혹스런 몇 번의 살인 미수들을 통해 지나는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전 정신없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서스펜스를 보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지." (헉;) 그들은 어차피 한 탕의 짧은 게임을 뛰는 것 뿐입니다. 정신없는 장면들이 지나가고 땀에 젖은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짠- 자막이 올라오겠지요. 전 그 주인공들에게 별로 애착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 앞에 닥친 상황이 너무나 커서 다른 이전의 것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전의 상황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로운 게임 속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게임이 끝나면 또 잊은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지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어도 "이제 학교 따윈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해버리지 못합니다. 그 공포가 은근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이죠. 평상심을 유지하기엔 공포가 너무 크고, 일상을 포기하기엔 공포가 너무 작습니다. 공포 앞에 선 지나는 학교, 대입, 친구관계, 가족관계를 걱정합니다. 차라리 "넌 외계의 공주야"라고 말해 주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를텐데 말이지요. (어디서 본 듯 합니다;) 이 작품은 그 아슬한 경계에 서있고, 이것은 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의 우발적인 살인들은 모두 약간의 미움, 약간의 의심이 갑자기 터트려지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지나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약간의 미움, 약간의 의심이라도 경계하며 바라보게 됩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묘한 위화감이 생길 수가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공포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 만화의 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애정에만 얽혀 있어 얄팍한 치정 사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감정의 흐름이 뒤틀릴 일이 애정 문제뿐만은 아닐텐데요. 강하고 따뜻하고 모두에게나 사랑받는 여주인공도 그다지 제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고요.

[케이크]에 연재되었고, 현재 시공사에서 4권 완결로 나왔습니다. 푸른색 톤의 표지는 고급스럽지만 매권 비슷해 다소 심심한 감이 있군요.

2001.10.29. 닭의비행.
2001.11.11. 수정

물음표 외계인의 슬픔

Posted 2001/10/10 23:18, Filed under: 사회와 기술
보통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린 무엇을 궁금해하죠? 예를 들어 친구의 애인이라든지 새로 들어온 후배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전 무엇을 물을지 망설이다가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버립니다. 얼굴을 봤다면 선입견을 통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기록해둘지도 모르겠지만요.

예전엔 통신에서 누군가를 접하면 참 답답해 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가 감이 잡히지 않으면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어요. 나이와 성별로 추정되는 대략적이고 전형적인 이미지를 대강이라도 설정해 놓지 않으면 어쩔 줄을 모르겠더군요. 시간이 흐르고, 또 대강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이젠 원자구름처럼 모호한 실체나 프리챌의 물음표 외계인(자신의 아바타를 설정하기 전에 나타나는 흉악한 모습을 일컬음. 지구인이라고 보기 힘은 외모에 얼굴엔 눈코입이 없고 대신 커다란 물음표가 전신에 그려져있음.)과도 게시판을 통해 소통할 수 있고, 가끔은 정팅 등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나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의 성별과 나이, 학교, 직업, 외모 등으로 모든 걸 판단해버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본 신상명세를 밝히지 않고는 편입할 수 없었던 오프라인 세계에 대해서요. 반면 온라인 게시판 같은 곳들은 어떻죠? 한참이 지나도록 상대의 아이디와 이메일 밖에 알지 못합니다. 홈페이지를 아는 경우는 그나마 신상명세를 많이 알 수 있는 경우지만요. 이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될 때까지 자신의 다른 정보로 단정되어 버리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게시판에서 익숙한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는데 얼마나 걸렸나요? 때론 몇 십개의 글과 몇 달이 지나야만 "그 사람이 존재한다"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하죠. 그리고 일년이 넘도록 글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이 전에 그 말을 했던 사람과 동일한 사람인가" 이런 것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반면 학교에서, 다른 모임에서, 오프에서 만난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는데 얼마나 걸리죠? 사람이 많지 않은 경우 단 하루면 충분합니다. 일년간 게시판에서 보면서도 모호한 이미지밖에 갖고 있지 못하던 사람을 한 번의 오프모임 이후로 뚜렷이 인지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몇 가지 색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색깔을 본 후, 다른 색깔들의 표본에서 같은 색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이랬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말로 코드화할 수 있는 색에 대해서는 정확히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무어라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색은 곧잘 잊고, 틀렸습니다. 똑같이 색을 보았다고 해도 머릿 속에 저장되는 형식에 따라 인지 능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기억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모는 엄청난 편견을 제공할 수 있는 집합체이지만, 그만큼 빨리 개인에 대한 정보를 저장할 방을 만들기도 합니다. 학벌과 직업, 성별, 나이 등도 그와 같죠. 일단 몇 가지의 특징적인 정보를 가지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저장할 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정보가 그 방에 덧붙여집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방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여러 정보들이 스쳐 지나가고, 방에 모이는 대신 휩쓸려 사라집니다.

내가 게시판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여전히 헛갈려하는 것은 나의 죄가 아니에요. 그들이 상투화되기 전엔 쉽게 방이 만들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들을 내맘대로 단정해버리고 기억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섣불리 단정짓지 않는 대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을까요.

2001.10.10. 닭의비행.

기동이 (양영순) 1~2

Posted 2001/10/04 23:17, Filed under: 만화
총판에서 만화책을 고르다 [기동이]를 발견한 순간, 저는 "이것이 바로 판매용 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냉큼 집었죠. 양영순 님의 네임 밸류와, 고급스러운 제본과, 랩핑이 없어 들춰볼 수 있었던 몇 쪽들을 보고요.

[기동이]는 짧은 만화입니다. [누들누드]에서 볼 수 있었던 성적 농담과 [싸이케치]에서 볼 수 있었던 잔혹극이 함께 섞여 있죠. 그런 이야기를 끊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니, 양영순 님도 참 대단한 인간인 것 같습니다. 4쪽 안에서 단순한 선의 컬러 그림으로 엉뚱한 이야기를 끝없이 합니다.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한 남자아이 기동이와 그의 누나, 엄마, 아빠로 가족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에피소드가 이들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이야기들이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이 끝없이 게시판에 퍼다 나르고 라디오에서 읽어대는 "착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꽤 싫어하기 때문에 그의 짖궂은 농담들이 재미있어서 다시 꺼내 읽으며 또 한 번 키득거립니다. 그가 바라는 대로 지저분한 장면들과 잔혹한 장면들에서 인상을 찌푸리면서요.

[스포츠조선]에 연재되었으며, G&S(개나소나 -_-;)에서 두 권으로 발행되었습니다. 가격은 7000원, 8000원으로 꽤 비싼 편이지만 일반적인 3000원짜리 만화책과는 그 형식과 제본 등이 다르니까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만화는 한 권에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가있는 법이죠. 종이도 좋고 전면 컬러 인쇄이고요.

2001.10.4. 닭의비행.

기동이
양영순 | G&S | 1~2권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Posted 2001/10/03 23:16, Filed under:
The Age of Access (Jeremy Rifkin)

제가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것은 저 자신이 얼마나 시대 속의 인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언가 특별하길 바라는 개개의 인간에게 이것은 꽤나 잔인한 말입니다. "넌 이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낸 아주 흔해빠진 먼지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저에게 있어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제가 골수까지 자본주의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 관념 없이 미래를 향해 내달리던 저에게 약간의 따끔한 침을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변화, 즉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이동에 대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소유와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돈을 주고 물건을 사다 집에 들여놓고,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같은 듯 해도 다르게, 그것도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한 번 돈을 지불하고 무엇을 영원히 소유하고 그것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자신이 가졌던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정 시간을 사용하는 대가로 일정 기간마다 돈을 지불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의 제한된 사용권을 얻을 뿐 절대 그 이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환경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아웃소싱이나 리스 형식으로 일정 기간만 사용하는 것이 일일히 사들이고 팔아치우는 것보다 더 유리합니다. 재적 재산은 한 번의 지불로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가구같은 것과는 달리 소유권의 일부가 계속 저작자에게 남아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물건보다는 지속적인 서비스가 더욱 큰 가치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 사회를 소유보다 접속을 선호하게 만듭니다. 제가 매달 내고 있는 통신 요금이 그 가까운 예입니다. 저는 전용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달동안 사용할 접속권을 얻은 것 뿐이죠.

저자는 이 흐름이 좋거나 나쁘다고 결론을 모으지는 않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각 분야에서의 변화가 어떤 섬뜩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네트워크에 접속할 권리가 없는, 세계적으로 대다수인 사람들을 더욱 더 철저히 소외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 정보나 식물 품종과 같이 원래 우리가 손안에 쥐고 있던 것들에 대한 권리까지 빼앗겨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더 적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게 되겠죠.

이런 접속의 질서들을 제가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제가 최근에 꿈꾸던 세상은 거의 완전한 접속의 세상이었으니까요.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절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을 세상의 고유한 것인마냥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의 꿈이 집단 무의식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죠. 조금은, "정말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될 지도 모르는 시점입니다.

2001.10.3. 닭의비행.

24시간 사회 (레온 크라이츠먼)

Posted 2001/09/15 23:14, Filed under:
24 Hour Society (Leon Kreitzman)

같은 책을 읽더라도 어떤 상태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읽는 사람에게는 크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서점에서 [24시간 사회]를 골랐을 때는, 제가 전통적인 사회와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 사이에서 상당히 혼란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아냐.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도 나쁠 거 없어"라고 토닥거려주는 셈이었죠.

우리의 삶은 전보다 더 빨리 돌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사무를 처리하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죠. 문제는 그것이 좋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밤에 서비스를 받는 만큼, 밤에 근무하거나 교대제로 근무해야 합니다. 덜 벌고 덜 쓰느냐, 많이 벌고 많이 쓰느냐와 같은 문제입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세상이 24시간 사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것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공감하는 것은 "비싼 기계값을 치르기 위해서" 입니다. 공장은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비싼 기계를 사다 놓습니다. 이 기계를 쓸 수 있는 것은 "구식이 되어 밀려나기 전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100개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과 300개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유리하겠습니까. 물건이 잘 팔리기만 한다면 기계를 24시간 돌려 최대한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기계값이 아깝지 않겠죠. 그리고 기계를 24시간 돌리기 위해서는 밤교대로 공장을 관리할 인력이 필요합니다.

재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24시간의 근무가 필요합니다. 물건이 배송되다가 군데군데에서 밤시간에 걸려 정체되어 있는 것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원활하게 흘러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것 중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우세하겠죠. 이것은 창고의 크기를 줄이고, 재고에 따른 이자 부담을 줄이며, 주문에 따른 배송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단지 "번갈아 일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가능합니다.

저자는 사람이 밤에 일하는 것, 또는 변화하는 근무시간에 맞춰서 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체 시계라는 것이 밤에 일하기에 부적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공적인 환경 등으로 그 생체 시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희망적인 시각입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24시간 사회는 매우 이상적입니다. 비록 모든 기업이 24시간 가동을 추구하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24시간 사회는 비용을 절감해주고 기업을 더욱 생기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회가 더 행복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대세니 따르라고 하는 것은 저의 근본적인 혼란을 잠재워주지 못합니다. 기업들의 성공 사례는 여전히 절 설레게 하지만요.

조만간 주5일 근무제를 얻어낼 것 같은 일반 노동자들과 가족과 함께 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컨설팅, 증권, 첨단 기술 분야의 고급 노동자들 중 시간에 착취당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자진 헌납"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24시간 사회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을 보려면 미국을 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밝을 때만 일하는 곳을 보려면 독일에 가보세요. 같은 선진국으로 분류되지만 극과 극의 노선을 밟고 있는 두 곳. 유럽은 북유럽과 영국 정도를 빼고는 대부분 정보화 사회나 빨리 돌아가는 사회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버텨도 되는 것일까요? 나중에 누가 더 잘했다고 칭찬받을까요? 지켜 보자구요. 제가 섣불리 말했다간 야단맞을 것 같으니까요.

[민음사]에서 2001년에 출판되었고, 원저는 1999년에 나왔습니다. 역자는 한상진이고, 가격은 10,000원이며, 편집은 깔끔합니다. 쪽번호 옆의 해와 달 그림이 귀엽군요.

2001.9.15. 닭의비행.

비상소집 (고유리)

Posted 2001/09/15 23:13, Filed under: 만화
[비상소집]은 학교물입니다. (학원물이라는 건 어디서 나온 단어인가요? 일본은 학교를 학원이라고 불러서 그런가요?)

학교물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죠. 비교적 정상적인 학교에서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것과 정상적인 학교에서 뭔가 심오한 주인공들이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결계를 형성하는 것, 그리고 좀 특수한 학교 설정을 해놓고 황당하게 까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인 분류가 될 것입니다. 이 만화는 그 세 번째 경우인, 특수한 학교 설정을 해놓고 황당하게 까는 것에 해당합니다.

각 학교에서 비정상적인 행각으로 추방된 아이들은 옥상 위에 특수 학급이 있는 이 학교(이름이 뭐죠?;)로 보내집니다. 정강이와 봉우리가 합류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들쭉날쭉한 갖가지 아이들과 야리꾸리한 옷을 입고 날뛰는 차선생, 그리고 가끔 나오지만 의미심장한 미남 교장 오빠 등이 등장하죠. 점잖게 말하면 "대안 학교"정도 될겁니다, 아마.;

"웃긴 만화"를 적극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웃기지 않을 경우에는 좀 썰렁해질 수 있지만 한참 진행되도록 꾸준히 어느 정도의 재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다지 좋아하는 그림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괜찮고요. 로맨스나 변신 소녀물 등 정형화된 것을 패러디하는 것이나, 여러 학생들이 제각끔 산만하게 떠드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써먹어서 약간 위태롭습니다.

그렇지만 여자아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솜씨는 꽤 통쾌합니다. 노출증 환자들에게는 뻔뻔하게 쳐다봐주는 것으로 응하고, 지하철의 다리 벌리고 앉는 아저씨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리를 벌려서 그들을 제압하고, 체육시간의 여자아이들을 감상하며 키득거리는 남자아이들에게는 마찬가지로 그들을 성적 대상화하여 보면서 키득거리는 것으로 응합니다. "이에는 이"라는 거죠.

이야기에 등장하는 방법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적인 외모나 남자보다 강한 신체적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에게 주입된 도덕적 금기를 떨치고 뻔뻔해지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보통 여자들에게 실행 가능한 일이고, 모두가 마음의 찜찜함 없이 같이 유쾌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만화는 상당히 "여자 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슈]에 연재중이며, 대원 씨아이에서 현재 2권까지 발행되어 있습니다. 구하기는 쉽습니다. 지나치게 알록달록한 표지가 고급스러움을 감하는 것이 단점입니다. 참, 저는 등장 인물들 중 함장이 제일 좋더군요. ^^

2001.9.15. 닭의비행.


비상소집
고유리 | 대원 | 1~5권 완결

사람의 살아가는 속도

Posted 2001/09/05 23:11, Filed under: 사회와 기술
컴퓨터가 사무실을 차지하고 우리가 많은 자료를 모니터 상에서 처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각각 소비하는 종이의 양은 과거 어느 때보다 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낭비 성향이 늘어난 인간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자료를 읽어대고 있습니 다. 우리가 읽어대는 글들의 양에 비하면 우리는 종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시간에 비해서이죠.

오늘날 "개발된 사회"에서의 인간들은 많이 만들고 많이 씁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고 많은 재화를 쓸 수 있으므로 풍족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편 시간에 밀려 만족감도 느낄 새 없이 재화를 먹어치워 버리는 만큼 불행하고 허무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10년 동안 한 대의 자동차를 사용하는 사람과 다섯 대의 자동차를 바꾸는 사람 중에서는 누가 더 행복합니까. 그리고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는 사람과 다섯 권의 책을 읽는 사람 중에서는 누가 행복합니까.

빠르게 사는 사람들은 느리게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일해야 합니다. 그 말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물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빠르게 사는 요즘의 사람들이 느리게 살던 이전의 사람들에 비해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 그것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정말 행복해진 삶인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답은 "수명"입니다. 빠르게 사는 요즘의 사람들은 느리게 살던 이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긴 삶을 삽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들이 지구가 태양을 70 바퀴 도는 동안 계속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을 1 바퀴 도는 동안 훨씬 긴 "인간의 1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3배의 물건을 만들고 3배의 물건을 쓰고 3배의 쓰레기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방탕하고 탐욕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3배의 긴 긴 "인간의 1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50살에 죽었다면 70살에 죽는 요즘의 한 사람은 옛날 사람의 삶에 비해 4배 정도나 긴 210 "옛날 인간의 1년"을 살고 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사람의 행복이라면 지금은 단연코 예전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불행이라면 그 반대이겠죠.

어떤 사람은 오래 살길 원하고 어떤 사람은 일찍 삶에 지치듯이, 어떤 사람들은 빠르게 살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느리게 살고 싶어합니다. 덜 일하고 덜 쓰면서 자신이 원하는 속도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속도에 자신이 떠밀리고 있다고 느낍니다.

왜 사람은 일주일에 3일만 일하는 대신 남들 반만큼의 옷을 사고 반만큼의 잡지를 보며 안정되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의 일부는 활동하는 양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거리, 두 가지 모두가 과금 체계에 포함되는 택시의 미터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느리게 달려도 승객은 시간에 대해 돈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리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적게 먹고 사는 것도 아니며 남보다 싸게 집을 빌리지도 못하고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지도 못하며 시간의 단위로 내는 전화 요금을 할인받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느리게 사는 사람은 "지구의 시간"(지구가 돌고 빛이 진동하는 시간)에 대하여 훨씬 적게 소비하지만 "인간의 시간"(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에 대하여는 오히려 더 많이 소비합니다. 인간의 생산량은 "인간의 시간"과 비례하는 개념이므로, 느리게 사는 사람은 같은 양의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재벌 2세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가 생산하는 것보다 많이 소비하는 것을 용납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산성이 이자를 갚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사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무시받고 모욕받고 독촉을 받습니다. 이자를 갚지 못하는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하듯이 자신의 유지 비용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있지 않아야 한다고 세상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자율을 정하는 것이 사회이듯이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속도를 정하는 것도 사회입니다. 우리는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사회의 "권장 삶의 속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2001.9.5. 닭의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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